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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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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2015년 01월 18일 14시 46분  조회:5496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전기적인 잠복영웅 전장비

 
(번역)




 
 
1895년에 절강성 호주의 한 상인가정에서 출생한 전장비(钱壮飞)는 본명이 전장추(钱壮秋)이다. 1919년에 국립북경의과전문학교(지금의 북경대학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북경에 남아 의사사업을 하면서 미술과 해부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또 서예와 무선전기술에 능하기도 했다. 1925년에 그는 부인 장진화(张振华)와 함께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7년에 대혁명이 실패한후 전장비는 풍옥상의 서북군에 들어가 군의(军医)로 있다가 봉급을 제때에 주지 않기에 상해로 들어가면서 조직과 잠시 련계를 잃게 되였다. 이듬해 8월에 전장비는 무선전훈련반초생광고를 보고 시험을 쳐서 수석으로 합격되였다. 이 훈련반은 국민당이 새로 세운 특무조직에 속했다. 전장비는 일이 중대한것을 느끼고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리국농을 찾아갔다. 주은래는 이 소식을 들은후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여 전장비에게 잠복임무를 맡겼다.
1929년말에 전장비는 리극농(李克农), 호저(胡底)와 함께 당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의 최고정보기관에 잠복해 들어갔다. 재능이 넘치고 총명한 전장비는 국민당중앙조직부 당무조사과 특무두목 서은증(徐恩曾)의 기요비서로 임명되였다.
주은래는 해방후에 “그들 세 사람(리극농, 전장비, 호저)은 범의 굴에 깊숙히 잠입해들어갔는데 룡담3걸(龙潭三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만약 룡담3걸이 없었더라면 중국공산당의 력사는 다시 써야 할것입니다”라고 감탄조로 말한 적이 있다.
1928년 8월에 전장비는 국민정부건설위원회 무선전관리처 상해주재판사처에서 꾸린 훈련반에 수석으로 합격되여 들어갔다. 그후 무선전관리처의 상해영업처에 배치된 그는 그 당시에 무선전관리처의 영업과장 겸 상해영업처주임직을 맡고있던 서은증의 눈에 들었다. 진립부의 직계사촌동생인 서은증은 전장비가 업무에 능하고 자기와 한고향인것을 보고 자신의 업무관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에 서은정에게는 정부가 있었는데 합당한 거처가 없었다. 공산당조직에서는 그녀를 전장비의 집에 거주하게 했다. 그렇게 되여 전장비의 집은 더욱 안전하게 되였다. 서은정은 자신의 처가 모르도록 정부를 숨겨준 전장비의 “의로운 행위”에 대해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1929년 12월에 서은정은 국민당중앙조직부 총무부 주임 겸 당무조사과 주임대리직에 임명되였다. 서은정은 주동적으로 전장비를 기용비서로 추천했다. 중공중앙특수과에서는 리국농, 전장비, 호저에게 특별당소조를 세우고 함께 국민당특무기관에 잠복해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국민당고위급관원들은 암호문을 가지고 오가는 정보내용을 알아보군 했다. 장개석과 진립부의 지시에 따라 당무조사과의 암호문은 서은증이 혼자서 직접 보관했다가 혼자서 사용하고있었다. 전장비는 몰래 보험궤안에 들어있는 암호문을 꺼내여 특무용카메라로 찍어두었다. 전장비는 이 암호문을 통해 국민당최고위급내의 핵심기밀을 장악했다.
1930년 겨울부터 1931년 2월까지의 기간에 장개석은 혁명근거지에 대해 제1차포위토벌과 제2차포위토벌을 감행했는데 전장비는 해당병력부서와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여 리극농, 진갱(陈赓) 등을 통해 당중앙에 보내주었다.
1931년 4월에 장기간 중공중앙기관의 보위사업을 책임졌던 고순장(顾顺章)이 무한에서 적들에게 붙잡힌후 반변했다. 고순장은 상해의 중공중앙비밀을 전부 적들에게 털어놓았다. 위급상황에서 전장비는 자신이 장악한 비밀암호로 6통의 특급비밀전보문을 풀어서 제때에 정보를 리극농에게 보내주었다. 리극농은 이 정보를 진갱에게 전해주었고 진갱은 또 이 위급한 상황을 주은래에게 보고했다. 주은래는 상해의 중공중앙과 강소성위, 공산국제원동국의 기관을 지휘하여 긴급히 전이하게 했다. 4월 27일밤에 고순장과 련계가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주은래, 구추백, 왕명, 박고, 등영초, 등소평, 진운, 진갱, 섭영진 등 지도동지들과 지하교통원들이 순리롭게 위험에서 벗어났다.
전국이 해방된후 주은래는 여러번이나 “전장비동지가 아니였더면 우리는 모두 국민당반동파의 손에 죽었을것입니다”라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1934년 10월에 전장비는 장정에 참가했고 1935년 1월에 열린 준의회의후 홍군총정치부 부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해 4월에 전장비는 귀주성 금사현 후산향에서 사망되였다. 향년 39세였다.
백색구역에서 퇴각하여 쏘베트구역으로 돌아온후 전장비는 홍1방면군을 따라 기나긴 장정길에 발자국을 남겼지만 불행하게도 귀주성 오강변에서 기이하게 실종되였다.
전장비는 서쌍영(徐双英)과 결혼하여 1914년에 맏딸 전초(钱椒)를 보고 1915년에 둘째딸 전진진(钱蓁蓁)을 보았다. 전진진은 려리리(黎莉莉)라고도 한다. 전장비는 1915년에 장진화를 알게 되여 1919년에 그녀와 결혼했다. 장진화는 아들 전강(钱江)과 전굉(钱锽)을 낳았다. 전굉은 후에 전일평(钱一平)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전일평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것은 1931년 4월 26일 깊은 밤이였다. 그 시기에 우리는 상해 성도로에 거주했다. 밤중에 어머니가 이불속에서 자는 나를 잡아일으켰다. 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빨리, 빨리 일어나라. 다른데 가서 자야한다’고 하는 말밖에 안들렸다. 그때 나는 일곱살이였다.
아버지는 미처 어머니에게 몇마디 부탁도 못하고 급히 상에 엎드려 편지 한통을 썼다. 그리고 곤난이 있으면 조직에서 관심해줄것이니 어머니더러 할머니와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라고 하면서 만약 서은증徐恩曾이 우리를 난처하게 굴면 그 편지를 공개하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넘겨준후 급히 나갔다. 어머니는 사태의 엄중성을 알고 아버지를 붙잡고 시집올 때 가지고왔던 장신구를 아버지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잠간동안 본후 우리는 그와의 련계를 잃게 되였다.
아버지가 떠난후 과연 서은증은 나의 누나 전초(钱椒)를 붙잡아 남경경비사령부에 가두었다. 그후 그는 아버지가 그의 탐오부패를 적발할가봐 두려워 누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아버지의 막내아들이였다. 나의 누나 전초는 아버지를 따라 정보사업의 제1선에서 사업했다. 형님 전강(钱江)은  영화 《중화의 아들딸》을 찍은 저명한 촬영사이며 감독이였다. 둘째 누나 려리리는 1930년대 중국의 저명한 “무성영화황후”였다. 나는 형님과 누나의 문예재능은 모두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것이라고 생각된다.
국립북경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의술을 정통했을뿐만아니라 서예, 미술, 조각, 만화와 가곡창작에 능했으며 《홍색간첩》, 《누구를 위해 희생하는가》 등 극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음력설을 쇨 때 아버지는 빈센트로 약솜을 집어서 주련을 썼는데 그 정경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전장비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모택동은 전장비의 실종에 대해 매우 큰 중시를 돌리면서 홍5군퇀에 통지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전장비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홍5군퇀은 명령을 받은후 이 임무를 군퇀 보위국장 구양의(欧阳毅)에게 맡겼다. 구양의는 신속하게 부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서 전장비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림속과 마을을 샅샅이 뒤졌으나 전장비의 종적을 찾지 못했다. 특수한 전선의 전기적 영웅 전장비는 이렇게 우연하게 혁명대오에서 소실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실종경과에 대해 알게 되였다. 원래 그가 군위2국의 부국장에 임명되였을 때 군위수장이 많았기때문에 그에게 당나귀밖에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행군속도가 늦어져 오강을 건너갈 때 대부대와 뒤떨어지게 되였다. 그때 적기가 폭격을 하는 바람에 피해서 수림속으로 들어갔던 그는 토비들에게 발견되여 붙잡히게 되였다. 토비들은 그가 홍군의 고급간부인것을 보고 그를 인질로 삼아 재물을 협박하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부대가 멀리 떠났기때문에 련계할수 없었다. 전장비는 상해에 있는 안해에게 편지를 써서 방법을 대여 돈을 가지고 자신을 구하러 오라고 했다. 그의 안해는 편지를 받았지만 길이 멀고 또 국민당통치구역이였기때문에 남편을 구하러 갈 방법이 없었다. 결과 전장비는 토비들에게 살해되였다. 하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전장비의 진정한 사망원인은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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